예수님의 꿈을 이루는 교회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 (Juan Kim)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제 한 달이 지나면 5년 동안 공부하던 M. Div.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하게 된다. 졸업과 동시에 새로운 패턴의 선교사의 삶을 살고자 기도하고 있다. 지난 24년 동안 자비량 선교사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파트타임으로 사역을 했지만 이제는 풀타임을 드려서 예수님이 꿈꾸셨던 교회를 세워 나가고자 한다. 아르헨티나에 와서 처음 8년은 언 어를 배우면서 선배선교사님의 사역을 동역했고 다음 13년 정도는 캠퍼스 선교에 도전했 다. 이후 신학공부를 시작하고 지역교회를 세우고자 사역의 방향을 바꾸고 몇 년의 세월 이 흘렀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제 선교사 2기를 시작하는 시점에 와 있다.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세 가지를 숙고하려고 한다. 첫째, 나는 무엇을 꿈꾸며 그동안 선교사의 삶을 살아왔는지 되돌아보고자 한다. 둘째, 하나님의 꿈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셋째, 하나님의 꿈을 내 꿈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계획해 보려고 한다.

I. 나의 꿈

대학교 입학식 날 한 선배의 인도로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에 인도되어 예수님을 인격적 으로 만나게 되었다. 같은 신앙적인 열정을 품은 형제들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믿음을 키 워 나갔고 선교사명을 영접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아르헨티나에 1년 반 동안 선교사로 사 역하던 서그라시엘라 선교사와 결혼을 하고 1997년 3월 선교지 아르헨티나에 도착하였 다. 자비량 선교사로서 현지 언어를 익히면서 물질자립의 길을 찾았다. 대부분의 이곳 교 민들이 의류 업에 종사 하였지만 초기 투자자금이 없었던 우리가정은 인쇄업을 시작하였 다. 종이냄새를 맡으며 일하는 것이 좋았고 하나님의 여러 도우심을 경험 하면서 순조로 운 물질자립을 이루어 나갔다.

선교지에 도착한지 1년쯤 지나서 큰아이 사무엘이 태어났고 2년 뒤 둘째 사라가 태어났다. 자녀양육, 물질자립, 언어공부, 사역을 한꺼번에 감당해야 하는 이 시기가 아마도 육 체적으로 가장 바쁘고 힘들었던 기간 이었던 것 같다. 이 즈음에는 나는 오른쪽 청력을 거의 잃어 버렸다. 지속적인 소음과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라시엘라 동역자 는 갑상선 저하 증에 걸려서 매일 약으로 보충해 줘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 이들은 잘 자라 주었고, 인쇄 하는 일도 점점 적응이 되어 같다. 스페인어 실력도 늘어나 서 어느 정도 원주민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2005년이 되어서 8년 정도 동역하던 신엘리야 선교사님에게서 독립하여 교회를 개척 하였다. 교회를 따로 구입하기가 부담스러워 꼬르도바 대학교 근처에 조금 큰 집을 얻어 주 차장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장차 지도자들로 성장할 대학생들을 제자로 키워 아르 헨티나를 복음화 하고자 하는 큰 비전을 가지고 켐퍼스 선교를 시작했다.

아르헨티나는 국민의 77%가 가톨릭이고, 10%정도가 개신교 신자이다. 가톨릭 국가인 이곳에서 10%의 개신교 교인은 굉장한 숫자이다. 아르헨티나는 1980년대에 큰 부흥의 시간 이 있었고 꼬르도바도 마찬가지다. 남미의 대부분 교회는 오순절 교회들이다. 찬양하는 시간에 교회 안에 있으면 록 벤드의 공연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소리가 크고 앞에서는 깃발을 흔들고 탬버린을 치면서 춤을 추곤 한다. 이런 분위기는 지성인들이 적응하기에 쉽지 않다. 많은 학생들이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신앙을 떠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서 대학생을 찾는 것은 더욱 어렵다. 개신교 교회들은 주고 도시 외곽의 서민들을 중심으로 많은 부흥을 이루었다. 반면 도시 중심에는 성당이 주를 이루고 중산층들이 많다. 이 처럼 캠퍼스의 영적인 환경은 광야와도 같고 거기서 선교를 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교회를 개척한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학과 2학년인 까를로스 형제를 예배에 초대 하였다. 까를로스는 가정집 주차장에서 3명이서 드리는 예배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잘 나와 주었다. 2년이 지나 집의 계약기간이 끝나면서 정부에서 지원하는 20년 상환 내 집 마련 정책에 지원을 했다. 정치권에 연줄이 있어야만 당첨될 것 같은 어렵지만 파격적인 조건의 정책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집을 마련할 수 있었고 경제적인 부담을 많이 덜수 있게 되었다. 뒤 마당에 지붕을 덮어서 넓은 실내공간을 만들고 예배처소로 삼았다. 주차장 보다는 훨씬 예배당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시 캠퍼스에 나가서 전도를 하였고 이번에는 토목공학과 1학년인 까를로스 형제를 만났다. 둘이 이름이 같아서 새롭게 알게 된 형제는 애칭인 까를리또라고 부르기로 했다. 까를리또는 남쪽의 추운 지방에서 유학을 왔는데 1학년을 세 번째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형적인 가톡릭 집안에서 자랐지만 외로운 객지 생활에서 만난 친절한 개신교 선교사의 초대가 반가웠다. 얼마 후 구스따보라는 입학 준비생만 10년 가까이 하고 있는 형제를 만났다. 한동안 그가 진짜 입학을 준비하는 신입생 인줄만 알았다. 구스따보는 활기찬 입학 준비생들의 분위기가 좋아서 직업도 없이 매년 봄이면 신입생이 되었다. 그외에도 페르난도, 가브리엘, 올란도, 마르꼬, 죠니, 죠나단 등의 학생들을 만났다. 그중에서 까를로스와 까를리또가 지속적으로 예배에 나왔다.

 2010년 여름이 가까이 왔을 때 지인들과 강가에 가서 까를로스에게 세례를 주었다. 몇 년후 까를리또에게도 세례를 주었다. 주중엔 일하는 것이 즐거웠고, 수입도 괜찮아서 아이 들도 사립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주일에는 반가운 형제들과 말씀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때로는 마음에 부담감이 몰려왔다. 지금 내가 선교사로서 제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적인 엘리트들을 세워서 아르헨티나의 부흥에 기여 하겠다는 원대했던 꿈과, 겨우 자기들의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두 까를로스와, 그들이 세상으로 떠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하고 있는 우리 부부를 바라보니 왠지 모를 괘리감이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깊이질 때면 내가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확실 한가 의문이 들었다. 선교회에서 심어준 선교사명의 근거는 “네가 선교사로 부르심받지 않았으면 왜 이런 선교단체에 인도되었겠냐!” 라는 것이다. 학생 때는 명확했던 그 논리가 현실 앞에서 점점 약해지고 희미해졌다. 그러던 중 마르틴 로이드 죤스 목사님의 “사명을 받은 자의 증거”라는 주제의 글을 읽고는 마음에 큰 울림이 있었다. 사명을 받은자는 때로는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낙심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말씀에 사로잡 혀 큰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사명감에 불타는 자라는 것이다.

내가 아르헨티나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서 한국은 IMF사태를 맞았고, 나를 파송한 선교 단체는 개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단체의 정체성은 흔들렸고, 파송 받은 선교사들도 혼란스러웠다. 광야와 같은 선교지에서 생수와 같았던 본국 형제들의 관심어린 격려와 선교편지들도 점점 뜸해졌다. 광야에서 40년간 양을 치면서 살았던 모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사명을 섬겨야 하는 이유와 목적은 점점 희미해져 갔고 눈에 보이는 결과 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마다 주시는 은혜가 계속 사명을 붙들게 하 였다. 20대 후반의 자신만만했던 세계선교의 거창한 나의 꿈은 안개처럼 사라졌지만 나는 지금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II. 하나님의 꿈

까를리또가 세례를 받던 해 까를로스는 신엘리야 선교사님의 딸과 결혼을 했고 그 교회에 동역을 하기 위해서 우리교회를 떠났다. 대신 자신의 아버지 레네를 교회에 참석 하도록 도왔고, 레네는 지금 동역자로 성장하고 있다. 까를리또는 선배 선교사님 교회에 어떤 자매와 연애를 하면서 원치 않는 아이를 가졌다. 까를리또의 어머니는 남편보다 30살이어렸으며 세 아이를 낳고는 얼마 후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가버렸다. 까를리또는 자신의 아이가 두 살이 되면 자기도 아이에 대한 책임을 다 한 것이므로 자유롭게 떠나겠다고했다. 그러나 첫째가 두 살 되던 해에 애인이 둘째를 가졌다. 다시 2년의 시간을 채우겠다고 했고 2년 후에 셋째를 가졌다. 더 이상 아이들을 두고 도망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 만 셋째 까밀라가 2살쯤 되었을 때 급성폐렴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 갔다. 특히 셋째를예뻐하던 까를리또는 7일간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매달렸고 아이는 극적으로 살아났다. 까를리또는 나와 10년 가까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변화된 것 보다 그 금식하며 기도한 7일 동안 더 많이 변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역사하시고 섭리 속에서 역사를 이루어나가심을 느낀다. 하나님께서 까를리또에게 처음으로 메시지를 던진 것은 아니었다. 학생 이었을 때 예배에 빠지고 밤새도록 디스코텍에서 놀다가 새벽에 나오면서 발을 헛디뎌 넘 어지면서 앞 이빨이 반으로 부서지는 사건이 있었다. 그렇게 얘기해도 못 알아들으니 하 나님께서 더 크게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C. S. 루이스가 한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 의 쾌락 속에서 속삭이시며,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고, 고통 속에서 호통을 치신다. 까를 리또는 코로나 사태가 있기 얼마 전 일을 구하려고 스페인으로 떠났고 거기서 회심을 체 험했다. 그와 전화를 하면서 이제는 정말 크리스챤이 되었구나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까를로스는 어릴 때 보았던 “초원의 집” 드라마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혼은 안했지만 늘 떨어져 살았던 부모님들을 보면서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에 대한 꿈을 키워 나갔 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선교사들을 보니 초원의 집과 분위기와 비슷했다고 한다. 선교사 님의 딸에게 마음이 갔고 끈질긴 구혼 끝에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다. 선교사님이 은퇴를 할 나이가 거의 다 되었는데 아마도 까를로스가 교회를 계승해서 섬기게 될 것 같다. 내 가 볼 때는 늘 위태위태하고 세상에 쓸려 가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웠던 형제가 하나님의 때에 사명인의 자리로 이끌려 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까를로스가 결혼한 이듬해 2015년 8월 신학공부를 시작하였고 신학공부를 3년쯤 하고난후 사역 방향을 지역교회 개척으로 바꾸었다. 먼저 예배당 쪽으로 나 있는 문에 걸 간판을 었다. 새들백 교회 이야기를 약간 벤치마킹해서 초대장을 만들어 봉투에 담아서 가까운 이웃에 돌리기 시작했다. 첫 주에 50장 정도만 돌렸는데 그 주에 할머니 한분이 오셨다. 저와 동역자는 힘이 나서 더 열심히 초대장을 돌렸다. 그달에 4명이 새롭게 왔다. 그렇게해서 그해에 어른과 아이들 합쳐 총 27명이 예배당에 발을 밟았다. 캠퍼스 선교를 한다고 13년동안 겨우 몇 명을 전도 했는데 지역교회를 방향을 틀고 나서는 스스로 교회에 찾아오는 영혼들을 만나면서 마음에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오라시오 형제는 지역교회를 시작하고 만난 형제다. 나와 만나기 몇 달 전에 자녀 교육을 위해서 파라과이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사를 왔다. 오라시오의 사정을 알고 있던 혼자 사는 한 친구가 자기 집에서 살 것을 제안했고, 오라시오 부부와 3명의 딸은 그 친구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이사 온지 몇 개월이 되지 않아 급작스러운 병으로 죽 으면서 오라시오는 길에 나앉게 되었다. 이제 신앙생활 한지 1년도 안된 형제 이지만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말씀을 붙들고 정말 간절히 기도하였다. 주일마다 온 가 족이 왕복 4시간을 버스를 타면서 예배에 참석 하였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정식 직장을 구했고, 월세 없이 공짜로 1년 동안 교회 근처에 집을 얻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 났다. 집주인은 전남편이 폭행으로 감옥에 갔다가 곧 출소하는 시기여서 혼자 있기가 무서워 공짜로라도 누군가 옆에서 살게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오라시오형제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게 되었고 다음해에 세례도 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축복을 누렸다. 한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신앙을 가지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다시금 보게 되었다.

지난 선교사역을 되돌아보면서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이끄시는 그 길이 조금은 다른것을 발견하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성공적인 사역이었고, 그것을 기초로 내가 성공한 선 교사임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도 그것을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나의 성공을 싫어하실 리는 없지만 하나님이 더 중점을 두고 계시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나의 성숙과 성화였다. 김후안 선교사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결정 적으로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의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분명히 보게 되었다. 학생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삶으로 경험해서 알 게 된 지식은 전해 다른 것 이었다.

III. 우리의 꿈

지역교회를 하면서부터는 더 다양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우로는 자녀가 세 명있는 로미나와 살고 있다. 세 명 모두 아버지가 다르지만 마우로는 친자식이라 생각하고 키우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우로와 로미나처럼 사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로이는 형제들이 넷이 있는데 아버지가 다 다르다. 얼마 전에는 평생을 사촌인줄 알고 지내던 사람이 사실은 자기 친형이라는 것을 알게 돼 힘들어 했었다. 로이는 마약에 중독되어 있는 자신의 고모 이야기를 해 주었다. 홈리스인 고모는 아이를 몇 명 낳았는지도 알 수 없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아 이가 태어나면 아이의 어머니가 키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정부에서 데리고 가서 키운다. 아이들이 조금 컷을 때 아이들의 할머니가 그 중 브렌다와 글로리아를 집으로 데리고 와 서 키우고 있다. 둘 다 20살 안팎인데 5살 7살 딸들이 있다. 작년 코로나 사태가 있기 두 달 전에 유년 주일학교를 시작하면서 5살인 하스민과 7살인 시오마라를 초대 했다. 밝고 익살스런 천사들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처해있는 환경을 볼 때 자 신들의 어머니처럼 또는 마약중독자인 할머니처럼 될 개연성이 적지 않다.

 로이는 신앙생활을 오래 했지만 의지력이 부족하고 인간적으로 부족한 면들이 많이 보였다. 고쳐주고 싶은 마음에 자주 지적을 해 주었더니 한번은 로이가 이렇게 응수했다. “당신 눈에는 내가 부족하게 보일 수 있지만 내 주위에 있는 동기들은 도둑질하고, 마약 하고, 가족들 괴롭히면서 살고 있는데, 그나마 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느냐! ”하고 항변했다. 나는 놀랐고, 내가 마치 율법주의자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스가 폭발해 전신에 화상을 입은 마리아는 몸이 늘 아프고 사는 게 서럽다. 매일 전화 를 해서 그라시엘라 동역자에게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한다. 엘리야는 마리아 자매와 동거 하는 형제인데 스트레스가 쌓이면 포도주를 세병씩 마셔버린다. 에스뗄라는 젊었을 때 몇 년 동안 선교사로 남미 여러 곳을 돌며 전도를 했었는데 지금은 남편과 이혼하고 생활고 가운데 힘겹게 살고 있다. 다들 사연이 있고 뭔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교회에 나오고 있다. 하나님께 잘 보여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기복신앙이 저변에 깔려 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형제들이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만으로 그들이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음을 믿는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영광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결국에는 영광스럽게 변화시켜 놓고야 말 것을 믿는다. 그것은 지난 24년간 내가 경험한 것이고, 또 더 깊이 경험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교회사 연구에 의하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70%정도는 명목상의 신자들이라고 한다. 20%정도는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고 헌금도 하며 전도도 하지만 그 목적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이다. 나머지 10% 정도는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성도들이다. 나는 이 러한 상황이 극장에 비유된다고 본다. 극장에 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객이다. 이들은 명목상의 신자들이다.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사람들은 직분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연극을 하는 사람들 중에 아주 소수는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소수의 사역자 들이다. 무대에는 또한 많은 엑스트라들이 있다. 그들은 숫자도 많고 열심히 움직이지만 이야기 전개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대본을 쓰신 분은 하나님이다. 성령님께서 연극 감독을 하신다. 극장 밖에 있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이다. 그들이 포스터를 봤을 수는 있지만 극장 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관심이 없다.

선교단체에 있을 때는 영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우리가 최고라고 생각 했던 것 같다. 선교지에 와서도 장차 아르헨티나의 리더가 될 대학생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최고로 중요 한 사명을 섬기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극장 안에 주인공들만 있 어야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장 안의 대부분은 관객들이다. 그들도 스토 리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 어떤 관객은 주인공보다 스토리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수도 있 다. 관객들도 스토리에 반응하고 함께 호흡하는 동역자 들이다. 그들도 하나님 나라의 백 성이고 그들 중에서 몇몇은 다음번 커튼이 올라갔을 때 무대에 올라와 자기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지역교회를 섬기면서 선교단체 마인드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리더로 세우려고 했던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지역교회는 다양한 수준의 영적인 사람들이 함께 가는 공동체이다. 당 장은 수준차이가 날 수 있지만 언젠가는 모두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을 믿 는다. 주연을 맡은 사람들만이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은 구속사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역할을 하고 관객들도 그 이야기에 끌려들어갈 것이다. 중 요한 것은 그 스토리의 창작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사 속으로 이끌어 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길 원하신다. 끝가지 그곳에 남아있는 자들은 결 국 온전한 사람으로 변해 갈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교회는 거룩하고 영광스럽다.

결론

이제 며칠이 지나면 졸업이다. 졸업 후에 두 가지 면에서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자비량 선교사에서 풀타임 선교사로의 전환이다. 둘째는 캠퍼스 선교에서 지역 교회로의 전환이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지난 선교사역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주권”이다. 내가 살아내야 하는 삶이지만 이야기는 하나님이 끌고 가신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키우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 이 내게 인도해 주시는 양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길 기도한다. 나의 실력 없음을 볼 때 주춤하게 되지만 나를 연단하시고 영광스러운 자리까지 인도하실 주님을 날마다 더 신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