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셧다운의 의미 (로마 - 권여호수아)
한 사람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도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이 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한 무리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붙들고 왜 뛰느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모두가 왜 뛰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좀 더 빠르게 좀 더 신속히"
속도와 빠르기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급변의 시대에 세상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 우리는 앞뒤 쳐다볼 시간이 없습니다. 여유 자체가 사치입니다.
이솝의 우화 "개미와 베짱이"는 개미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해 놓았습니다..
성경에서도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라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 6:6 )
대개 개미집 주변엔 수많은 개미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잠시 쉬거나 잠자는 개미는 단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만 보면 개미가 부지런하다는 것이 절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이와 상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실제 먹이를 물고 나르는 개미는 의외로 극소수란 사실을 알게됩니다. 그냥 빈손으로 정신없이 왔다 갔다만 하는 개미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먹이를 나르는 개미도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개미는 자신보다 큰 먹이를 물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끙끙대고 있기도 하고, 어떤 개미는 먹이 같지 않은 것을 물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갑니다. 먹이가 장애물에 걸리면 쉽게 포기하는 개미도 있고 끝까지 고집 피우는 개미도 있습니다. 어떤 개미는 먹이를 물고 집 주변만 뱅뱅 돌기만 하고 반면 어떤 것은 먹이를 물고 집에 들어갔다 도로 물고 나오는 개미도 있습니다. 심지어 물고 나온 먹이를 밖에 내동댕이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개미도 있습니다. 한참을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개미는 부지런하다기보다 몹시 분주하다는 것이 맞습니다.
한 정신병원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선 환자의 퇴원 결정을 다음과 같은 실험으로 했습니다.
목욕탕에 수도를 틀어 놓습니다. 그리고 환자에게 걸레를 주고 바닥을 닦도록 합니다. 환자가 먼저 수돗꼭지를 잠그고 걸레질을 하면 퇴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환자는 수돗꼭지를 틀어 놓은 채 열심히 걸레질만 합니다.
열심히 톱질하는 벌목꾼이 있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애쓰는 그에게 한 사람이 다가와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톱날이 너무 무디군요. 톱날을 갈고 하시면 훨씬 일이 수월하실 것입니다."
이에 벌목꾼이 대답했습니다.
"이보오, 내겐 그런 시간이 없다오."
현대인들은 마치 분주한 개미 같고, 수돗꼭지를 틀어 놓은 채 열심히 걸레질하는 환자 같고, 무딘 톱질하는 벌목꾼 같습니다. 방향도 목적지도 없이 정지하지 못하고 폭주하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열차에 탄 사람들 같습니다.
어떤 유명 목사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하나님의 심판이라 말했습니다. 어떤 분은 코페르니쿠스 전환이라 말하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난 개인적으로 종말을 향해 폭주하는 인류 열차를 잠시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생각합니다. 종말을 예고하는 파괴된 생태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들이 이를 답변해 주고 있습니다.
전 세계인은 죽음의 공포 속에 몇 가지 심각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생산한 약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손톱만 한 칩에 도서관 장서를 집어넣은들 무슨 유익이 있는가?
우주를 여행하고 복제 인간까지 온 최첨단 과학과 100세 시대의 의술이 무용지물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하늘까지 올랐던 인간의 교만은 바다 심연까지 내려갔습니다.
2차 세계 대전 후 유신론자는 무신론자가 되어 돌아왔고 무신론자는 유신론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유신론자는 참혹한 죽음 앞에 신이 계시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절망했고 무신론자는 신을 찾지 않으면 도무지 그 참혹함을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 전 인류는 무엇보다 신을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한 자도 있을 것이고 울부짖으며 찾은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코로나를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시고 당신께 돌아오는 기회가 되게 하십니다. 인간의 무력함과 한계 앞에 하나님만 신뢰하고 의지하게 하십니다. 멈춤을 통해 파괴된 생태계를 소생시키시며 멸망으로 치닫던 열차를 새 출발 하게 하십니다. 전 세계는 모두 이전의 평상시 삶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이전과 같은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는 일상의 삶을 가장 소중한 시간으로 여기며 만사 감사함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Coronavirus Shutdown (권여호수아 선교사님)
한 사람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도 뛰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한 무리가 되었다. 한 사람을 붙들고 왜 뛰느냐 물었다. 그러자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더 놀라운 것은 모두가 왜 뛰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좀 더 빠르게 좀 더 신속히" 속도와 빠르기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급변의 시대에서 세상은 정신 없이 돌아간다.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 우리는 앞뒤 쳐다볼 시간이 없다. 여유 자체가 사치다.
이솝의 우화 "개미와 베짱이"는 개미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해 놓았다. 성경에서도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라 말한다. (잠언 6:6 ) 많은 사람들이 개미 예찬을 통해 일하기를 싫어하고 놀고 먹기를 좋아하는 자들에게 개미의 노동을 배우라 외친다. 그런데 실제 개미를 잘 관찰하면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대개 개미집 주변엔 수많은 개미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고 2-3미터 긴 행렬로 왕복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잠시 쉬거나 잠자는 개미는 단 한마리도 찾아 볼 수 없다. 이것만 보면 개미가 부지런하다는 것이 결코 틀리지 않다. 그런데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이와 상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 먹이를 물고 나르는 개미는 의외로 극소수다. 그냥 빈손으로 정신없이 왔다갔다만 하는 개미가 부지기 수다. 그런데 먹이를 나르는 개미도 천차만별이다. 어떤 개미는 자신보다 큰 먹이를 물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끙끙대고 있고, 어떤 개미는 먹이같지 않은 것을 물고 종종 걸음으로 달려간다. 먹이가 장애물에 걸리면 쉽게 포기하는 개미도 있고 끝까지 고집 피우는 개미도 있다. 어떤 개미는 먹이를 물고 집 주변만 뱅뱅 돌기만 하고 반면 어떤 것은 먹이를 물고 집에 들어 갔다 도로 물고 나오는 개미도 있다. 심지어 물고 나온 먹이를 밖에 내동댕이 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개미도 있다. 한참을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것을 보면 개미는 부지런하다기 보다 몹시 분주하다는 것이 맞다.
한 정신병원이 있었다. 그곳에선 환자의 퇴원 결정을 다음과 같은 실험으로 했다. 목욕탕에 수도를 틀어 놓는다. 그리고 환자에게 걸레를 주고 바닥을 닦도록 한다. 환자가 수돗꼭지를 잠그고 걸레질을 하면 퇴원이다. 그런데 대부분 수돗꼭지를 틀어 놓은 채 열심히 걸레질만 한다.
열심히 톱질하는 벌목꾼이 있었다. 한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애쓰는 그에게 다가와 이렇게 조언했다. "톱 날이 너무 무디군요. 톱 날을 갈고 하시면 훨씬 일이 수월하실 것입니다." 이에 벌목꾼이 대답했다. "이보오, 내겐 그런 시간이 없다오."
현대인들은 분주한 개미같고, 수돗꼭지를 틀어 놓은 채 열심히 걸레질 하는 환자 같고, 무딘 톱질하는 벌목꾼 같다. 무엇보다 방향도 목적지도 없이 정지하지 못하고 폭주하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열차에 탄 사람들 같다.
어떤 유명 목사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하나님의 심판이라 말한다. 어떤 유명 신학자는 코페르니쿠스 전환이라 말하며 다시 예전으로 돌아 갈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종말을 향해 폭주하는 인류 열차를 잠시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생각한다. 종말을 예고하는 파괴된 생태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뉴스들이 이를 답변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전 세계인은 lockdown 기간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자신을 돌아보았다. 손가락 터치 하나로 모든 정보를 다 알아내고 복제 인간까지 온 최첨단 기술과 의술이 무용지물이란 것을 알았다. 하늘까지 올랐던 인간의 교만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맥없이 죽어나가는 무력함에 지금까지 인류가 생산한 약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손톱만한 칩에 도서관 장서를 집어넣은들 무슨 유익이 있는가?
2차 세계 대전 후 비신자는 신자가 되어 돌아왔고 신자는 무신자가 되어 돌아왔다. 신자는 참혹한 죽음 앞에 신이 계시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절망했고 비신자는 신을 찾지 않으면 도무지 참혹함을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 코로나로 많은 비신자들괴 집 떠난 탕자같은 자들이 하나님을 많이 생각했을 것이다. 울부짖으며 찾은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주여! 당신 앞에 무릎 꿇고 간구하오니 코로나를 통해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게 하시며 믿지 않는 자들과 주님 곁을 떠났던 자들이 당신께 돌아오는 기회되게 하소서 파괴된 생태계를 소생시키시며 멸망으로 치닫던 열차를 멈추시고 향방을 찾아 새출발하게 하소서 이전과 같은 기회를 주시고 앞으로 일상의 삶을 가장 소중한 시간으로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이아브라함)
에스겔 47장 1-12절
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성전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처럼 아버지께서는 저희들도 성전으로 데리고 가시기 원하십니다. 왜 우리들을 데리고 가실까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 생수의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번성하는 생물이 살아나고 고기도 심히 많아지고 죽었던 바다도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볼때 생물이 죽어가고 바다가 죽어가는 그 현상 자체는 문제가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내가 능력이 없고 주변에 문제가 많은 것도 근본 문제는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부터 생명의 강이 흘러나오면 모든 문제는 사라지고 생명동산이 되고 생명바다가 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 모든 문제들의 해결 열쇠는 생수의 강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살아납니다!
아버지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생수의 강이 되어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흘러가기를 기뻐하십니다. 에스겔의 환상을 보시기를 소망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은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아멘!
기도의 나팔 (이아브라함)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 사사기 6:34 -
이전에는 미디안이 쳐들어 왔을때 기드온은 포도주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숨어서 자신의 목숨이라도 구하고 싶은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했을때 그는 미디안 군대 앞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가 성령의 사람이 되었을때 일어서서 믿음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는 원수들 앞에서 뒤로 물러나지 않고 전쟁나팔을 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고 우리가 GCMI로 모이지 못하였다면 지금은 코로나 앞에서 각자 살아갈 것을 걱정하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저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하나되게 하시고 코로나 전쟁터에서 두려워 하지 않고 믿음의 나팔을 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로 모이자’고, ‘구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자’고 나팔을 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기드온이 나팔을 불때 사람들이 거룩한 두려움으로 함께 모였습니다. 300명의 용사들이 함께 힘차게 나팔을 불때 하나님께서 크신 승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모여서 믿음의 나팔, 사랑의 나팔을 불때 흩어졌던 모든 CMI 선교사님들이 함께 나팔을 불며 모이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가 이전에는 모르던 새 일을 행하실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통하여 크신 승리의 역사를 이루실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루실 기적과 승리를 기대하며 오늘도 기도의 나팔을 불겠습니다. 아멘!
Abraham Lee
Servant of Jesus
여호와께서 감동시키시매 (이아브라함)
“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에스라 3:10, 11 -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 학개 1:14 -
며칠 전 런던에 도착한 GCMI News Letter 창간호를 읽으며 시드니에서 저희에게 주신 은혜를 다시 묵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드니 수양회는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건축자로 부르시고 성전 기초를 놓게 하시는 시간이었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흩어졌던 선교사들의 마음을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하나되게 하시고 어른들과 청년들을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멘! 성령께서 하나가 된 공동체에 하늘의 기쁨을 주셔서 노래하며 춤추게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말씀을 들으며 나보다 형제를 낫게 여기고 아무도 제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는 21세기의 초대교회를 꿈꾸게 하셨습니다. 아멘!
이제 4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Covid19로 인하여 그 기쁨의 일부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News Letter가 배포되는 중에 작은 염려가 생겼습니다. 건축자들의 손이 피곤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은 우리의 영을 다시 감동시켜 주십니다. GCMI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일하여 주십니다. 곳곳에서 나무를 베는 소리가 들립니다. 석공들의 돌 다듬는 소리를 듣습니다. 선교사도 현지 목자도 2세들도 기쁨으로 동참합니다. 놓여진 기초에 기둥들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일을 시작하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때가 되면 지붕이 올라가는 것도 볼 수 있겠지요? 아버지여! 회장님, 사무총장님과 8분의 대륙 대표들의 마음을 계속하여 감동시켜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건축자들의 손을 강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이 식어져 가는 말세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룰수 있다면 우리 구주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아버지의 감동케 하심으로 이제는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숫자를 많게 하는 것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내게 더 큰 기쁨이라는 것을… 형제가 행복할때 진정한 행복이 나의 깊은 배속까지 채운다는 것을… 오늘도 세워져 가는 아버지의 집을 기쁨으로 바라보며 두손 모아 주님께 나아갑니다.
기도의 나팔 (홍마가)
저녁밥 짓는 연기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평화스럽던 유대의 촌락들
갑자기 메뚜기떼처럼 몰려온
미디안들의 발굽 아래 처절히 짓밟히고
산속에 쫓겨간 백성들은
토굴에 피하여 승냥이 같이 살았다
칠 년의 압제 속에
궁핍함이 날로 심하여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군상들의 부르짖음
그 소리 하늘에 사무쳐
한 종을 부르셨으니
그 이름 기드온!
두려움에 절어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던 그를
여호와는 ‘큰 용사’라 하셨다
두려움과 원망 가득한 자가
어찌 큰 용사가 되리요?
자신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그를
민족의 구원자로 부르시니
어찌 회의와 두려움이 없을 수 있었으랴
하지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한
여호와의 약속 붙들고
나팔을 힘차게 불었으니
이는 믿음의 나팔! 기도의 나팔!
이는 네트워크의 나팔! 섬김의 나팔!
여호와께서는 이를 승리의 나팔이 되게 하셨다
고통 가득한 우리 시대에
나팔소리 다시 울려 퍼지고
여호와의 용사들이 여기 모였으니
그 이름 Global CMI!
네트워크, 서로 섬김,
사랑으로 하나 되어
어떤 폭풍이 와도 우리 전진하리라
우리가 부는 나팔소리에
저기 무너지는 원수 미디안의 견고한 진들을 보라
이 땅에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나라를 보라
그 나라 힘차게 세계로, 세계로 뻗어가리라
5/21/2020
사사기 6장 기드온의 나팔에 영감을 받아 쓴 시
GCMI 사역 위하여 간절히 기도 부탁드립니다
21세기의 아론 (이아브라함)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아론이 모세의 명령을 따라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민수기 16:46,47,48)
땅이 입을 벌려 거역하던 고라와 그 일당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민수기16: 1–35). 그런데 이스라엘은 패역자들이 심판 당함을 보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은 더욱 완악하여 모세와 그를 택하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어떻게 그들은 이렇게까지 완악할 수 있을까요? 결국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습니다. 염병이 쓰나미처럼 밀려왔습니다. 백성들의 진 한쪽에서 부터 죽음의 통곡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코비드19로 무너지고 있는 이 세상을 연상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면서도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거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아니라 동성애 퍼레이드를 하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인생들은 맘몬에 취하여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평화라는 가면을 쓰고 종교통합의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 같으며 노아의 때와도 같습니다. 분명, 지금의 코비드 사태는 인생들의 죄악 때문에 쓰나미 처럼 밀려오는 하나님의 경고하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땅을 심판하기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완악한 인생들일지라도 깨닫고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구원과 사랑입니다! 그러나 누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속죄 향로를 들고 죽은자와 산자의 사이에 설 것입니까? 누가 담대히 나아가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설 것입니까?
하나님은 오늘 21세기의 아론을 찾으십니다.
아모스 7:14,15 (이아브라함)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아모스 7:14,15-
저는 10살때부터 소를 돌보았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를 끌고 들로 나가 꼴을 먹였습니다. 풀이 없는 겨울에는 볏집과 겨를 섞어서 죽을 끓여 먹여 주었습니다. 15살 때부터는 아버님이 포도원을 만드셔서 여름내내 땀을 흘리며 포도밭에서 일을 했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아들도 아니고 선생님의 아들도 아니고 소치기이며 포도원지기였습니다. 이런 소년의 작은 꿈은 밥벌이할 직장을 얻고 착한 아내를 맞이하여 단솔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길과 진리 생명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눈을 들어 세계를 보게 하시고 선교사가 되기를 꿈꾸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유럽은 그저 동경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으로 오게 하시고 유럽을 누비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제게 이런 기적의 역사를 이루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유럽 백성들에게 예언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소치던 목동이 유럽영혼을 돌보기를 원하시고 포도원지기가 하나님의 동산을 돌보는 청지기가 되도록 부르십니다. 제게 성령을 부으사 예언을 주셔서 천사도 흠모하는 직분을 감당하게 하소서.
우리는 흙수저였으나 하나님은 금수저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소중히 쓰이는 천국수저로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저희에게 하나님의 예언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제는 부르신 뜻대로 사용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며 몸과 영혼을 맡겨드립니다. 아멘.